뉴저지한인회 역사
해방후 본격적인 한인들의 뉴저지 유입이 일어났는데 몇몇 과학자들과 저지시티 메디칼센터에 취업으로 이민온 간호원 및 가족들이 비교적 초기 이민자들로 꼽힌다.
60년대 말로부터 70년대 초까지 이민이 증가하자 뉴저지 여러곳(저지시티, 뉴브런스윅, 먼머스카운티, 남부의 체리힐, 포트딕스, 트렌톤 등지)에서 교포들의 모임이 이루어지기 시작했으며, 이들은 10-20명 규모의 조그만 친목단체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70년대 중반을 고비로 대규모 이민이 몰려오자 뉴저지에도 한인회가 생겨야 된다는 여론이 일기 시작, 그때가지 뉴욕한인회 행사에 참여하던 뉴저지 교포들이 저지시티를 중심으로 한인회를 태동시키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이때가 1975년으로 그해 10월4일 개천절 다음날을 기해 저지시티에 저날스케어 근처 프라자 호텔에 모인 교포들은 초대 회장에 당시 주유소를 경영, 재력을 키운 김상진씨를 선출하고 조직적인 단체로서는 처음으로 뉴저지 한인회를 창립했다.
창립초기에는 뉴저지한인회로 출발했으나, 뉴저지한인회가 저지시티에서 출범 면서 당시 같은 시기에 남부지역에서 동포들을 중심으로 활동 중이던 한미회, 중앙(맘모스, 오션, 아스베리팍등)지역에서는 한미상협,그리고 중부지역(미들쎅스)의 동민회등이 한인회로 명칭을 변경하면서 즉시 대두 된것이 주 정부나 한국정부와의 관련된 업무와 창구 일원화를 위해서 어느 단체가 대변해야 할것인가라는 데서 연합체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이 문제로 뉴저지한인회를 비롯해서 각 지역 한인회에서 오랜동안의 모임을 통해오면서 1985년에 이르러 본격적인 연합회(Federation) 창설을 논의한 끝에 1986 년 뉴저지한인총연합회를 탄생시키고 그동안 10년간 사용하던 뉴저지한인회란 명칭을 내려 놓았다.
초창기의 한인회는 회보발간, 체육대회, 의료진료, 취업안내, 미군입대 안내, 주소록발간등 주로 동포를 대상으로한 봉사활동에 주력하였으나, 후반기에 들어서면서 점차 지역 주민들과 화합을 위한 활동사업을 늘려가기 시작했으며, 80년대 중반에 들어 서면서 시민권자협회, 공화당, 민주당 한인 후원회가 결성 되며 점차 정치참여에도 관심을 같기 시작했다.
당시의 뉴저지한인회는 연합회가 창립되기 전 까지 각 지역에 분산되어 있는 지역 한인회들을 하나로 묶어 주 및 지역 정부와 한국정부등을 상대로하는 창구의 일원화의 절실한 필요를 느껴서 1986년 3월26일 뉴브런스윅에 있는 라마다인에 모여 뉴저지한인총연합회 구성을 결의하고 동년 7월10일 주정부에 등록을 마치고, 9월1일 회칙과 임원진을 확정하고 10월3일 뉴저지한인총연합회(the Federation of Korean associations of New Jersey)로서 정식 출범하였다.
뉴저지 총연은 점차로 교민봉사 활동의 범위를 늘려 당시 뉴저지의 유일한 주립대학인 럿거스(Rutgers)대학에 한국어학과 개설을 위한 후원회 활동과 주지사 선거, 주의원선거 및 로칼정부 선거등에 직접 간접으로 참여하는등 그 활동 영역을 넓히면서 2세들의 육성사업에도 적극적인 의욕과 후원을 아끼지 않으면서 차세대를 이끌어갈 2세 지도자들의 육성계획을 적극 논의들 했다.
동포들의 수가 증가하면서 뉴저지에는 한인회 외에도 수많은 경제단체와 직능단체들이 생겨나 동포 경제 사회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당시 경제 단체론 경영인협회, 패터슨상인번영회, 뉴왁상조회, 트렌튼경제인협회, 팰리사이드팍 상인번영회, 포트리 실업인협회, 허드슨번영회, 뉴저지한미경제인총연합회등이 생겨났으며, 직능 단체로선 뉴저지네일협회, 뉴저지한인세탁협회 등이 설립되어 동포들의 생업과 직결되는 업종의 이익보호 단체 역활을 했다. 또한 당시 뉴저지동포사회에 빼놓을수없는 단체가 태권도인들의 모임이다. 태권도는 주로 미국인들을 상대로 가르치면서 항상 한국말로서 구령을 외치도록 함으로서 태권도 종주국이 한국임을 알게하는등 한국인의 자존심을 드높이며 미국인 사회와의 원활한 대화 채널을 만들어왔다.